일간 보관물: 2013/04/02

[닦살01] 나물요원이 되겠어

닦고, 뜯고, 살아가라(1)

나물요원이 되겠어!

2013년 3월. 석달 째 괴롭고 슬픈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이 오고나서야 겨우 잠이 들었고 당연하게도 한낮이 되어서야 겨우 깼다.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아서 사나흘씩 집밖을 나서지 않는 건 다반사였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뭘 해야할지 모르겠는 데다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서 하루종일 아이폰을 붙잡고 트위터나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스스로 내게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그저 어떤 마음이라도 자연스럽게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디 오랬동안 아프셨고 언제고 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해왔었으니까. 나는 유일하게 직장을 다니지 않는 자식이어서 우리들보다 수백, 수만배는 더 괴로울 엄마 옆에서 사십구재까지만이라도 함께 지낼수 있었다. 그럴 수 있는 내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임종 직전 열흘 남짓, 이후 쉰 날 정도는 아버지만을 생각하고 돌아가신 분을 충분히 그리워하며 슬퍼하고 자식으로서 내가 가진 죄책감과 부채감 따위를 지우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돈을 많이 벌지도 그럴듯한 직장에 다니지도 않았고 예측할 수 없이 제멋대로인 삶을 살아서 늘 두 분을 불안하게 했다. 그렇지만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을 사는 것이 효도라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드린 인사도 그랬다. 걱정마시라, 지금껏 늘 선택하고 책임지고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다. 그게 나의 행복이라고. 그러면서도 당신들께서 나를 걱정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면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 언제부턴가 그렇게 하는 것도 귀찮아 거짓말하거나 말을 전혀 하지 않는 식이었다. 가족은 화목한 편에 속했고 부모님은 나를 귀여워해주셨지만 늘 위태로운 느낌이셨겠지. 특히 다른집 자식들 아니 더 직접적으로는 우리집의 다른 자식들과 비교하여 걱정하시는 마음에 크게 반항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작년 여름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두어달 뒤에 들켰을 때 아버지가 많이 놀라셨는데 제대로 사과하지 못하고 흐지부지 보낸 일이 마음에 좀 걸렸다. 두서너 해 전에 당신의 자서전을 편집해서 소책자 형태로 만들어보라고 주신 원고도 작업을 마치지 못한 상태로 내 방에 있다. 그런 것들이 아쉽다. 죄송하다. 앞으로 살면서는 내가 지금껏 못했던 일들이 떠올라 더 죄송할수도 있을 거다. 그렇게 조금씩 이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갚아가거나, 애도하거나, 살아내려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지켰다.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침이 반갑지도 않고 하루를 사는 것이 별 의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사망신고나 소유권 이전 등 해야할 일은 꽤 있었지만 사십구일 동안 하기에 많은 양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엄마는 아침저녁으로 젯밥을 올리면서 우는 날이 많았고 처음 며칠은 나도 함께 절도 올리고 담배도 태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늦잠을 자고 아무것도 하니 않는 날들이 늘어났다. 두 분이 사시던 집에 엄마를 혼자 살게 둘 수 없어 고향집에 남아있기로 한 건 같이 누가 시키지 않은 나의 마음이었는데 갑갑하고 답답하고 지겨운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겨우 사십구재를 지내고 엄마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왔는데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가 큰언니집에서 지내시든 우리집에서 지내시든지 나는 주로 내 방에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백수인 내가 시간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종종 엄마 친구댁이나 병원에 모셔다 드리는 일을 했다.

이제 좀 달라져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천천히 들었다. 이런 괴로운 시간을 끝내고 싶었는데 바쁘게 예전 직장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작년 여름부터 해오던 “덜 벌고 덜 쓰면서 재미있게 살기”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할지.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조차 헷갈렸다. 그러던 와중 꽤 매력적인 일자리 제안을 하나 받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 경력에 도움이 되는 일,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일, 의미있고 중요한 일이었다. 잘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을 잠을 못자고 고민해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러다 가게되겠지, 하는 마음과 하다보면 잘하겠지, 내가 아직도 업계의 인력시장에서 유효한 인물이구나 하는 위안 따위만 있었다. 어렵게 거절하고 다시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재미삼아 구인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직 통장에 잔고도 남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돈이 들어가지 않으니 당장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그저 구인정보를 보면서 아직 일자리가 있긴있잖아, 닥치면 뭐든지 하면서 돈을 벌수 있겠는걸, 하면서 하루중 조금씩 재미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생기면 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그러다 우연히 “온날 나물뜯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경북 상주시 푸른누리에서 100일 동안 함께 살면서 산나물을 배우고 익히고 함께 나물뜯는 일을 할 사람을 찾는 광고였다. 새벽에 일어나 종일 일하고 채식 위주의 깔끔한 식사를 한다. 위빠싸나 명상을 함께한다. 심지어 일한 품삯도 준다. 푸른누리는 생태주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이거네! 앞뒤 잴 것 없이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해본적이 없어서 내가 해낼수 있을까 의심스럽긴했지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다 비슷하지 않을까? 난 자전거도 잘타고 잘걷고 무거운 것도 잘들고… 나물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된다니 이렇게 멋진 일이. 게닫가 돈도 벌어. 아침 일찍 일어나고 땀흘려 일하면 생활습관도 잘 자리잡겠지. 와 살도 완전 많이 빠지겠다. 신선한 채식밥상은 또 얼마나 맛있을 거야. 그렇게 신청서를 내고 오시라는 연락만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