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보관물: 2013 7월

[자전거카페=?] 02자전거_ 자전거여행하며 커피 내려마시는 법

20130723-144557.jpg
자전거카페는 자전거와 카페, 그러니까 자전거랑 커피가 합쳐진 것. 지난 번에는 커피, 길카페에 대해서 이야기 했으니 이번엔 자전거와의 인연에 대해서.

자전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초등학교 때 자전거에 혼자 올라타던 순간이다. 안장에 앉으면 발도 닿지 않는 큰 자전거를 날마다 끌고 다녔고 밤마다 성공적으로 올라타는 꿈을 꿨다. 그러다 정말 기적처럼 어느날 올라탔고 넘어지지 않았다. 방과 후 서예연습을 하던 단짝 친구를 데리러 오후 늦게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향했던 기억도 난다.

자전거에 대해 좋은 기억은 하나 더 있는데, 어느날 보조바퀴가 달린 어린이용 자전거를 빌려타고 모르는 골목길을 씽씽 달렸던 날. ‘처음 와보는 길이지만 무섭지 않아, 길을 잃을까 걱정되면 그대로 온 길을 뒤돌아 가면 되잖아, 자전거는 빠르니까!’ 이 기억 때문에 자전거를 그렇게 타고 싶어했는지, 자전거 타기에 성공하고 나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어렸을 때부터 난 자전거를 참 좋아하는 아이였다.
20130724-175508.jpg
그런데 어른이 될 때까지 자전거를 탈 기회는 별로 없었다. 중/고등/대학교까지 모두 도시 생활을 했으니 자전거를 탈 시간, 공간, 여유, 기회 모든 조건이 맞지 않았으니까. 휴학했을 때였나 아님 학교에 다닐때였나 중고로 자전거를 한 대 샀다. 한강다리를 한 번 건너야 했지만 어떻게든 자전거타고 학교에 한 번 가보겠다고 이리저리 알아봤는데 결국 자전거타고 학교는 한번도 못갔다.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도 잘 몰랐고, 지금처럼 자전거도로나, 자전거타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고, 지금보다 어려서 겁도 많았고, 쉽게 도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늘 말로만 원효대교를 건너면 학교에 갈 수 있을 텐데, 한강대교가 빠를텐데,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면서 가끔 한강변을 달리기도 했고, 아르바이트하러 갔고, 동아리모임에 타고 가기도 했고, 그러다 자전거를 도둑맞기도 했다. 나는 자전거를 좋아하는, 타는, 언제든 타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적다가 생각해보니 호주에 워킹홀리데이 갔을 때도 자전거를 하나 사서 학원 통학, 아르바이트 출퇴근을 하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다. 그러다가 친한 호주친구가 빌려줘서 돌아오기 전 한두 달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휴일날 아저씨랑 강변, 해변 라이딩도 갔다. 돌아오고 난 뒤엔 강남, 마포, 영등포 등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종종 자전거출퇴근을 했다.
20130724-174048.jpg

어른이 되어 내돈 주고 산 “내 자전거”의 역사는 나우누리던가 하이텔이던가 중고장터에서 훈남에게 중고로 산 “멋진놈이 타던 반짝이는 은씽이”부터 시작된다. 은씽이 도둑맞고 잠원동 트럭자전거 아저씨에게 산 쌩쌩이, 쌩쌩이는 중고 트렉자전거 살 때 되팔았고, 세번째 트렉도 회사에 두고 퇴근했다가 도둑맞았다, 네 번째로 잠원동 트럭아저씨한테 산 파란자전거 “잠원댁”도 꽤 오래탔다가 지금은 친구네 삼트라이다와 바꿔서 친구집에 있다. 삼트라이다는 이후 다른 친구에게 팔았다.
20130724-174111.jpg20130724-174117.jpg20130723-144549.jpg
지금 타는 “멜리”는 뉴질랜드 자전거여행갔을 때 한달간 빌려서 탈까 중고로 사서 탈까 하다가 대여용 자전거를 중고 가격으로 사서 그대로 들고온 녀석이다.
20130719-170347.jpg
커피를 챙겨서 마시기 시작한지는 5~6년쯤 되었고 직접 집에서 마시고, 콩까지 볶고, 점점 그럴듯한 커피인이 되어가다 보니 여행 가서도 커피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까운 국내 여행이나 친구집에 놀러갈 때도 핸드드립 커피 도구들을 싸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2011년 회사를 그만두고 일단 하고 싶은 것들을 천천히 하면서 다음 일을 생각하던 시절, 2005년에 다녀온 호주 생각이 났다. 다시 가자, 그러다가 그 때 안 가본 뉴질랜드도 가는 김에 갈까? 뉴질랜드 하면 자전거여행이라던데? 그래서 여행의 테마는 뉴질랜드자전거여행으로 결정되었다.

텐트, 코펠, 버너, 침낭, 매트 등 각종 캠핑도구를 친구, 친구의 남자친구, 언니의 친구 등에게 빌려 여행을 떠났다.
그 때에도 당연히! 커피도구들을 챙겨갔다. 참을 수 없이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를 대비한 것이기도 했고, 그러고 다니는 게 재미있어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호주친구들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니까. 언젠가부터 좋은 사람들에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으로 맛있는 커피를 내려서 대접하는 일은 큰 기쁨이었으니까.
20130723-144605.jpg20130723-144613.jpg
그러다가 커피 관련한 책을 보다가 드립커피가 먹고 싶은데 드립용 주둥이가 길고 가는 주전자가 없을 때 간장통 같은 걸로 해본다는 걸 보고 시도해보기로 했다. 친구가 다이소에서 주전자처럼 생긴 간장종지를 사줬다. 그래서 내 여행용 커피키트는 완성되었다. 그라인더/필터가 필요없는 철망드리퍼로 사용할 멸치망/꼬꼬마 주전자.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시작해서 루이스패스를 넘고 해안을 따라 또 어디어디를 넘고 퀸즈타운을 거져 어디어디를 거치고 밀포드 가는 험한 길을 가고….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또 한가득. 다음기회에 뉴질랜드 자전거 여행에 대한 이야기는 더 해보자, 지금은 자전거타는 여행자가 커피를 마시는 얘기를 하는 거니까.
20130723-145217.jpg20130723-144637.jpg
20130723-144515.jpg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전거여행을 가서도 커피를 마시게 된거다.

아마, 그렇게 탄생되었을 거다.
자전거 카페라는 건.

더 직접적인 계기도 있었다. 두어달 정도 집짓기 워크숍에서 만났던 좋은(좋아하는) 선배가 “너 같은 얘는 늦잠자다 자전거 타고 바닷가에 가서 커피나 한 두잔 팔고 하는게 딱 어울릴텐데..”라고 지나가듯 말한 적 있는데 그게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슨 근거로 그런말을 했는지, 그는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부터 나는 ‘언젠가 바닷가에 자전거나 타고 가서 커피파는 게 꿈’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20130723-144625.jpg20130723-144619.jpg20130723-144631.jpg20130719-171123.jpg

[칠월부엌] 팥빙수 리콜에서 배우는 초심주의

어제, 앞건물 사무실에서 팥빙수 포장 주문이 세 개나 들어왔다. 하루 평균 매출 만원인 이 작은 가게에 이런 대량주문이! 하는 기쁜마음으로 냉장고를 열었는데, 냉장실에 두 개 분량의 팥밖에 없었다. 냉동실에 꽁꽁 얼어있던 팥한 통을 꺼내 끓는 물에 녹이고 갈고 썰고 적절히 분배해서 세 개 완성. 대량주문이라 포장에 따로 넣기 힘들던 더치커피도 테이크아웃잔에 담아서 룰루랄라 배달 완료.

그런데 잠시 후…
“이거 팥을 한 번 먹어 보셔야 할 거 같아요. 덜 삶아진 거 같아서 먹을 수가 없네요”

“아. 네. 뭔가 문제가… $%&^$#@&& 일단 바로 환불해드릴게요”

입에 넣어보니 맞다. 덜 삶아진 거고, 냉동실에 바로 꺼낸 녀석이라 녹지도 않았을 거고, 뭐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

그 전날 팥빙수를 먹었던 지인손님1, 지인이 된 부엌프랜들리 단골손님1도 조심스레, 완곡한 표현으로 팥을 좀 더 삶아야 할 거 같다고 말했을 땐, 아이 이 사람들 내 팥빙수 스타일을 이해를 못하네, 난 통팥이 살아있는 게 좋단 말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 집에 갔던 팥은 정말 씹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매장에 있던 지인손님1, 지인의 지인손님1 주문을 해결하고 급하게 커피빙수를 두개 만들어서 아까 포장배달을 갔던 곳으로 가서 사과에 사과를 하고 돌아왔다.

“세 개 사가셨는데 만원밖에 안 돌려드려서 커피 빙수를 두 개 만들어왔어요. 팥은 다시 삶아야 해서 팥빙수를 해드릴수가 없어서”
“아, 안 그러셔도 되는데, 팥을 직접 삶으시나봐요”

네, 그렇습니다.
직접 삶습니다. 좋은 재료를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 라고 했지만 삶아서 냉동실에 넣어둔 팥을 바로 꺼내 대충 녹여서 내는 건…정성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그 간극을 메울 수 있는 기술이 내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뛰어난 기술이 없기 때문에
시간과 정성, 손맛으로 진심이 담긴 음식을 내놓자고 마음먹었으면서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 간사하구나.

대충 팥이 녹지 않을까,
갈고 썰고 내 스타일이라고 우기지 뭐,
연유 끓일려면 귀찮은데 우유에 그냥 시럽 넣고 얼릴까? 맛 똑같을 거 같은데..

솔직히 이런 생각들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초심초심 하는구나.

한달이란 시간이 짧기도 하지만, 충분하기도 해서 나는 마지막 4주차에 초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되찾자 초심!

칠월부엌이 전주갈 차비를 남겨주길 바랐지만 그것말고(요원하다) 이런 깨달음을 주는구나. 길게 보면 이런 경험치들이 쌓여 나를 만드는 것일게다. 고마운 인연들도 만났고….

*그래서 전 지금 팥을 삶고 있습니다. 어제 리콜된 팥은 폐기처분, 냉동실에 남아있던 녀석들은 어제 3차로 압력솥에 푹 삶아져 맛있는 녀석들이 되었고요. (그러니 어서 팥이 떨어지기 전에, 칠월이 다 가기 전에, 칠월부엌에 가자!)

20130723-141200.jpg

[자전거카페=?] 01커피_ 길드립 강정 할망물다방

20130719-171123.jpg
얼마전 어쩌다 자전거 카페를 시작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저 자연스럽게 자전거도 좋아하고 커피도 좋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나도 좀 궁금해졌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그 뒤를 캐고 싶어졌다.

날마다 자전거를 끌고 커피를 팔러 어디로 향하는 ‘그런’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자전거여행을 오랫동안 해온 것도 아니지만 자전거를 끌고 길거리 1인 카페를 열었다는 사실이 인상적인지 사람들은 그렇게 나를 기억했고, 나도 그런 설명을 마다하지 않았다.
20130719-171131.jpg
20130719-170156.jpg

“여행왔다가 경비나 좀 벌어볼까, 재미있게 사람들 좀 만나볼까 하고 이렇게 자전거 끌고 커피를 팔아요, 그러다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음 여행을 계속하게 되지요.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요”

라고 말하고 다녔고 실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행사장에 초대를 받아 지낸 적도 있다. “언제부터 자전거 여행을 하셨어요?”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세요?”라는 질문에 “지금은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여행하지는 않고, 여기도 차로 자전거를 싣고 왔는데요… 이 생활을 시작한 건 일년 정도 됐고요” 라고 대답하면 실망하시는 눈치. 그러면 뭔가 내가 사기를 치고 있나 하는 부끄러움에 이거이거 어떻게 하나 싶은 마음이 들지만 자전거와 커피, 돌아다니는 생활이 나를 설명해주는 것은 맞다.
20130720-121951.jpg
20130720-122331.jpg
20130719-170243.jpg

그래도, 어쩌다 자전거카페를 시작해었나 생각해보면 어느날 갑자기 ‘그래! 오늘부터 당장 바닷가에서 커피를 팔겠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다.

커피집에서 일하거나 어디서 배우거나 한 건 아니지만 실제로 길에서 커피를 내려서 사람들에게 팔거나 나눠준 적이 있기는 하다. 2011년 8월 제주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건설을 반대하는 강정마을 주민들과 활동가들과 함께 “할망물다방”을 열었다.

사실 나는 그 전부터 그저 ‘커피를 좋아해서 많이 마시는 사람’이었는데, 커피숍에서 사서 마시는 것보다는 집에서 직접 내려먹는 편이 싸고 맛있어서, 원두를 사는 것보다는 생두를 사서 볶아먹는 편이 싸서, 홈로스팅에 이르게 된 경우다.

20130719-164721.jpg
그래도 길에서 커피를 팔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은 해왔던 모양인지, 2011년 어느날의 트윗에 이런게 있더라. 강정마을에서 지낼 때 사진을 찾으러 옛날 트윗을 뒤져보다가 찾고선 한참 웃었다.

그 때 당시에는 회사 그만두고 카페나 할까, 수준의 상상이었을 거다. 할 거면 돈 많이 드는 카페보다는 노점이 낫지 않나, 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러다 진짜 회사를 그만두게 되자 가까이 지내던 친구와 2011년 8월에 강정마을에 좀 지내러 내려갔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해군기지건설에 반대하는 삼보일배순례, 문화제, 평화행동 등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관심, 연대와 방문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부당한 국가권력이나 자본에 반하는 행동들이 반사회적이라고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그런 “분쟁지역”을 방문한다는 것, 후원한다는 것, 적극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선뜻 몸과 마음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다행이 나는 함께 갈 좋은 친구가 있어서, 이전부터 이런저런 사회적 이슈들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어서 강정마을에 가는 것이 그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일 때문에 강정마을을 방문한 적도 두어번 있었다. 게다가 시위라든가 집회라든가 하는 것들이 점점 발랄해지는 추세여서 비장한 마음이 아니라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제주로 향했다.

현장에 마을 사람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는 것,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게 지속적인 활동에 힘이 된다. 그래서 상근활동가들은 제주강정으로 휴가라고 생각하고 와도 좋다. 와서 그저 함께 있기만 하는 것으로도 힘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갔다. 오라고 하니까, 갈 수 있으니까. 가면 좋다고 하니까. 나는 백수가 되어서 시간이 많았고, 제주를 좋아했고, 가면 방문자들을 위한 지낼 곳이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커피를 볶고 내려서 만드는 일이라면 길거리에서 커피를 팔아 그 수익금으로 강정마을을 돕겠다, 라고 생각했다.
20130719-164714.jpg

모카포트, 드리퍼, 그라인더, 서버, 커피를 볶을 수망, 생두 등등 길거리 카페를 차릴 수 있게 다 준비를 해갔는데 그 전날부터인가 마을에서 활동하고 있는 분들이 길에서 커피를 대접하면서 올레길을 걷는 분들이나 강정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홍보물도 나누어주면서 강정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친구도 거기에 합류하기로 했다.

20130719-164629.jpg
20130719-164655.jpg20130719-164559.jpg20130719-164609.jpg20130719-164648.jpg20130719-164620.jpg

그렇게 보름쯤 지내다 돌아왔다.
자전거와 커피, 길에서 커피를 내리는 것, 사람들에게 커피를 나눠주는 것, 커피콩을 볶는 것, 자전거에서 커피를 내리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루아침에 짠 하고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를 만들고 있었다.

여전히 강정마을엔 활동가들이 산다. 해군기지건설의 부당함을 알리고 지금이라도 이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칠월부엌] 매뉴얼4 – 저, 들어가도 되나요?

20130716-192833.jpg

-영업합니까?
-들어가도 되나요?
-식사 되요?

그럼요. 칠월부엌은 멀쩡한 영업장입니다. 카페라고 하기에도, 식당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지만 먹을 걸 파는 뎁니다.
게다가 주로, 비어있습니다 –;;

바로 문앞 좁은 길에 차가 많이 다녀서, 게다가 엄청 빨라요. 시끄럽습니다. 팥을 삶거나 밥을 할때 불을 쓰느라고 많이 더위지지 않을 때 빼고는 문을 주로 닫아놓습니다. 가끔은 밖이 적당히 환해서 불을 안 켜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영업하냐고 물어보는 손님도 있었지요. 그래서 “영업중” 간판도 달았습니다.
20130716-172842.jpg
20130716-172820.jpg
매장 안에는 작은탁자 세 개, 각각 의자 2개씩 총 6개가 있어요 그 중 한 탁자는 늘상 제가 차지하고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습니다. 작은 가게에 손님이 늘 있는 것 같은 효과를 줍니다. –;;

정원은 6명인데 제가 앉을 자리가 없어서 그런게 아니라 아마 6명 다 앉기엔 복잡하지 싶어요. 서너명만 같이 와도 다른 손님을 받을 수 없지요. 손님들 가방도 있고 하니까. 그래서 사람이 한 두명 있으면 가득찬 것처럼 보여서 안 들어오시는 경우도 있…다고 믿어봅니다. 호호.
사실 가득찬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냥 문열고 들어올 수 있나 없나 보시거나 말을 걸어주세요. (근데 나도 다른데 가서 그러는 사람이 아니다) 뭐 대부분 비어있으니 그냥 오시면 됩니다.

칠월부엌에 오는 손님들은 크게 네 종류입니다. A 지인 A’. 건너건너 아는 사람(트위터, 페이스북 친구, 친구의친구 등) B 당황하신 키친케이 고갱님 B’ 키친케이 왔다가 그냥 들어오신 손님 C 어딘지도 모르고 그냥 들어온 사람 D 동네주민. 아 방금도 앞집 인쇄소에 토스트를 팔았습니다. 감격스러운 순간입니다. 어제도 지나가다 “팥빙수 팔아예”하고 들어오신 할매&아지매 커플에게 비싸지만 맛있다, 는 평을 들었습니다.

햄버거 먹으러 왔다가 그냥 가신 손님들한테 설명하기 귀찮아서 앞에 “김사장부재중” 안내를 붙였더니 그런 손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네요. 호호. 키친케이 찾아왔다가 왜 버거를 안파나 하며 토스트를 사먹고 간 한 분은 단골이 되셨고요.

생각다방산책극장 친구들이랑, 서울에서 온 제 친구들, 어쩌다가 알게 된 부산에 계시는 분들이 지금까지 주요 고객이었는데요. 트위터에서 보고 오신 분도 있었어요. 제가 맨날 여행다니고 산에 들어갔다가 어디 놀러갔다가 이런식으로 길거리에서 커피나 팔고 하니 부잣집 자녀로 돈 안벌어도 되는 사람인줄 알았다는 분도 있네요. 호호 영광입니다.

직장다니면서 힘들게 돈 벌지 않는 사람은 맞지요. 긴긴 시간동안 그건 너무 괴롭고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했고, 다른 방식, 내게 맞는 방법을 찾는 중이니까요. 그래서 정말 돈을 벌 수 있냐,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걸 막 참아야 할 만큼 괴롭지는 않냐, 정말 행복하냐, 이런 질문을 하셨죠. 그렇다, 회사다닐 때보다는 낫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이기도 하고요. 돈이야 일단 많이 벌고 쓰자, 에서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벌자, 로 바뀌니 사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다.

각자 자기한테 맞는 방식으로 할수 있는 만큼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남들 다 참는데 왜 너는 못하니? 라는 말은 누구에겐 용기를 주는 말일 수 있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더 큰 좌절이었거든요. 왜 난 정말 못하는가!

사실 못할수도 있고, 잘할수도 있는 거잖아요. 못하는 게 없는 사람도 있고 잘하는 게 없는 사람도 있고. 뭐 그나마 나은 거 할만한 걸 하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직장생활하고 월급쟁이 하는 게 그나마 할만하다고 여기니까 그러는 거겠지요. 회사일이 즐겁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괴롭지만 그만두긴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나요. 저 같은 경우는 그게 다른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여서 계속 잘 안되더라고요.

용기를 내어 전혀 다른 방식을 시도해보자고 생각했죠. 사실 용기라거나 새로운 시도라기 보다는 그냥 회사다니기 싫다! 싫은건 정말 안하고 싶다.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살순 없나, 에서 단순히 시작한 것이긴 합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제가 생각하는 건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것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지지하고 기다려주는 것. 힘을 주는 것,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내가 생각하기에 도움이라고 생각하는 걸 막 함부로 주는 건 좋은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부산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번 들러주세요, 고갱니임~

20130716-193618.jpg

20130716-193628.jpg

[칠월부엌] 매뉴얼3 – 이렇게 이용하세요

칠월부엌 다섯가지 이용법

1)멀쩡한 카페처럼 먹고 마시고 시간보내고 놀기
20130716-175022.jpg
의자는 편하지 않지만 가게가 워낙 작기 때문에 다른 까페처럼 옆사람 때문에 시끄러울 우려가 없습니다. 왜! 오래 있다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죠. 호호 (사실 오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음악을 즐겨듣는 사람이 아니라 원래 혼자 있을 때 음악을 잘 안 틀어놓는 편이었는데, 명색이 커피파는 곳인데 음악이 있어야겠다 싶어서 생각다방콜렉션으로다가 좋은 음악을 준비해두었으니 오셔서 멀쩡한 카페에서 하는 것처럼 책보고, 일기쓰고, 편지쓰고, 노트북으로 작업하시고 그러세요.

2)외부음식 사다먹기 – 초장횟집만 있느냐, 음료식당도 있다!
20130716-224044.jpg
배고파서 밥먹고 싶은데 여기 밥은 안판다? 그럼 딴데서 사오세요. 와서 여기서 음료나 차, 팥빙수 드시면 되잖아요.
카페의 블루오션, 초장횟집의 업그레이드. 음료식당입니다. (인당 돈 받는 초장횟집처럼은 안합니다. 뭐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3)맘껏 하소연하는 푸념카페
20130716-181423.jpg일전에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일본 어느 거리에선가 “푸념을 들어드립니다”라는 서비스? 자원봉사? 비즈니스가 있다고요. 푸념을 맘껏 들어주는 거요.
칠월부엌에 오시는 분들 중에 제가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는 게 불안해보이는 사람도 있고, 부러워보이는 사람도 있고, 그러든지말든지 당신이 처한 이 피곤한 현실이 싫으실 수도 있는데요.
그럴땐 그냥 맘껏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자리가 필요하기도 하잖아요. 누군가 말을 끊고 들어오면서 그건 그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니가 하는 말이 얼마나 쓸데 없는지, 남들도 다 겪는 흔한 어려움인데 왜 너만 유별나게구냐는 둥. 어떤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저 나를 천천히 바라보고 지지해주는 사람이 필요한 순간에 대부분은 걱정이랍시고 (물론 진짜 애정어린 걱정이기도 합니다만) 찬물끼얹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있으면 가만히 지지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누구나 그런 좋은 친구를 갖기는 쉽지 않으니까, 또 내가 그런 좋은 친구가 되기도 어려우니까, 그런 고마운 친구를 둔 제가 먼저 그런 친구가 되어 드리려고 해요.
어짜피 칠월부엌은 좁아서 많은 사람이 들어오지 못합니다만, 조용히 혼자 이야기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다른 손님을 받지 않고 통째로 칠월부엌과 제 귀를 빌려드립니다. 마음껏 하고 싶은 말을 실컷하세요. 푸념하고 하소연하고 그리고 믿음과 지지를 갖고 돌아가세요. 저는 그렇게 좋은 마음을 먹고 자라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마음을 나눠야 하는 건 “직장없이 이렇게 살고 있는” 제가 가진 “사회적 소명“이기도 합니다.

4)요리해먹고 안 치워도 되는 오픈키친
20130716-181351.jpg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남들한테 먹이고 별로 성공한 적이 없어서 새로운 메뉴를 많이 만들지는 않을거에요. 뭔가 특별한 게 먹고 싶은 날, 아니면 식당밥 말고 집밥이 먹고 싶은 날, 주방시설이 필요하면 칠월부엌으로 오세요. 직접 요리하시고 드시고, 여럿이서 함께 와도 좋고요. 그러고 가시면 됩니다. 뒷정리는 제가 해요. 요리할 공간과 먹을 공간만 빌려드리려니 뭔가 서비스가 부족해서 설겆이도 제가 해드리려고요. ^^

5)심야식당처럼 재료사들고 와서 요리해달라 졸라보기 – 맛은 책임 못집니다
20130716-181259.jpg
김사장은 자기 저녁 먹을 때 뭐든 요리하니까 동네주민이나 단골손님과 나눠먹은 모양이던데, 저는 요리를 즐겨하는 편은 아니라요. 위에 말한대로 오픈키친으로 직접 조리해드셔도 되는데, 라면끓이기, 소세지굽기, 김치찌개, 된장찌게, 떡볶이 정도는 만드니까 와서 말씀 한 번 해보시던지요.

* 기념사진 촬영하고 백원할인 받아가세요~

20130716-181916.jpg

20130716-181949.jpg

[칠월부엌] 매뉴얼2 – 메뉴소개, 음식의 품격

20130716-174758.jpg

시간과 정성이 담뿍 들어간 레알홈메이드 슬로푸드
20130716-174908.jpg
키친케이에서 팔던 햄버거 만드는 법을 배워서 같은 메뉴를 팔면 좋겠지만, 신선한 재료를 그때그때 준비하고 고기패티를 반죽하고 적당한 시간과 온도로 굽는 게 생각보다 고난도 작업이어서 포기. 그럼 나는 잘 만들 수 있는 것, 팔만한 게 커피밖에 없는데 주변엔 온통 카페. 그리고 여기는 카페인테리어도 아니어서 의자가 편하지도 않은데 뭘 파나… 식사든 간식이든 최대한 간단한 샌드위치 두어종류를 팔면 좋겠다는 김사장의 추천대로 햄치즈토스트를 팔기로 했다. 직접 만든 쨈을 발라서 원가를 낮추기 위해 김사장 떠나기 전에 반여농수산물 도매시장에 가서 산딸기를 두 박스 사서 잼을 만들어두었다. (물론 김사장이-이때까지도 나는 요리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20130716-174631.jpg

당장 가게를 열어야 하는데 메뉴 확정도 못하고 만드는 방법도 손에 안 익어서 일단 커피/빙수/토스트로 한정하기로 했다. 할수있는만큼만 하면 되니까. 커피는 원래 하는 거니까 괜찮고 토스트는 쉬운 걸로 하면 되고, 빙수도 집에서 해먹어봤으니까 괜찮을 거다. 그리고 여름이니 시원한 걸 팔아야지.
20130716-172747.jpg
처음 한 주는 토스트 주문이 들어오면 빵을 굽다가 오븐에 손을 데고 토스트 포장을 제대로 못해서 어리버리하는 모습 그대로 노출. 가장 큰 어려움에 내가 만드는 음료와 음식에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늘 볶던 콩도 태우기 일쑤고 늘 내리던 커피도 왠지 더 맛없는 것 같았다. 빙수 주문이 들어오면 사방에 얼음을 튀겨가며 조리대를 흥건하게 만든 뒤에 볼품없는 빙수를 완성하곤 했다. 첫주에 왔던 사람들은 괜찮다, 자신을 가져라, 뻔뻔하게 하면된다고 말했지만 어디가 어떻게 맛이 없는지도 말해줬다. 고마운 사람들.

그렇게 보름 동안 메뉴는 발전에 발전에 거듭해, 부엌을 이용하는 나도 발전했다. 이제 내가 내는 토스트, 커피, 빙수 모든 음식 자신 있다.
20130716-175140.jpg20130716-175156.jpg
내가 내는 음식에는 시간과 정성, 손이 간다. 요리솜씨가 극강으로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좋은 재료를 써서, 번거러워서 할 수 없는 것들을, 내가 손님일때 먹고 싶은 것들을 만든다.
– 너무 달지 않은 빙수, 팥과 얼음 외에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국산팥을 직접 삶아 믿을 수 있는 음식을 만들자.
– 그냥 얼음 말고 커피얼음이 있는 아이스커피, 끝까지 맛있어야 한다.
– 특별한 비법이나 재료는 없지만, 만드는 방법은 쉽지만 정성스럽게 만든 샐러드, 토스트.
– 직접 커피콩을 볶고, 직접 커피 얼음을 얼리고, 직접 우유를 끓여 연유를 만들고, 직접 연유와 우유를 섞어 얼음을 얼리고, 직접 잼을 만들고, 직접 차를 담그고….

맛이 없을 까닭이 없다. 논과 밭의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했던가, 음식은 만드는 손이 얼마나 가는가에 따라 그 품위가 결정된다. 나는 우아한 음식을 만든다.

20130716-175247.jpg
20130716-174835.jpg
20130716-175409.jpg
20130716-174813.jpg

20130717-114425.jpg

[칠월부엌] 매뉴얼1 – 뭔지는 알고 가자

20130716-172656.jpg

부산 중앙동 사십계단 바로 옆, 키친케이는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가게다. 테이블 세 개가 전부인 이 수제햄버거가게는 지난 2월 20대 여사장 김싱싱 씨가 직접 개수대와 조리대 등을 만들어 달고 문을 열었다. 단골이 하나둘 생기려는 찰나 ‘자유로운 영혼’의 김사장은 7월 한달간 일본여행을 떠난다. 손님들이 깜짝 놀라면 좋은 기회가 생겨서 갑자기 결정되었다고 하지만 원래 아무 기회 없이도 8월에 아이슬란드 여행을 가겠다고 말하고 다녔다.
20130716-172641.jpg
나는 작년 여름 부산으로 숨어들었을 때 트위터에서 놀다가, 생각다방산책극장을 기웃거리다가 김싱싱 씨를 알게 되었다. 워낙에 손재주도 좋고, 요리도 잘하고, 영화, 책, 글쓰기를 좋아하는 괜찮은 아가씨여서 두고두고 곁에 두고 음식도 얻어 먹고 가끔 선물도 받고 친하게 지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만 자전거카페나 해볼까 하던 내게 선뜻 자전거를 빌려주고 해운대에서 판을 벌리도록 해준, 자전거카페를 여는 사람으로 나를 살게 한 muse 이기도 하다.
20130716-173040.jpg

한달간 문을 닫고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들었을 때, 오 그럼 그 가게 내가 볼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바닷가에서 자전거카페를 하는 거나, 중앙동에서 이것저것 만들어 파는 거나 뭐가 다를까 싶어서. 그저 재미있어 보여서, 안 해본 거니까. 불도 물도 맘대로 쓰면서 정식으로 가게에서 뭔가 해보는 건 또 다른 재미일테니까. 그러다보니 어쩌다가 나는 여기 이렇게 앉아있게 되었다.
20130716-181531.jpg
20130716-193636.jpg
20130716-172949.jpg

아빠, 내 마음

20130711-123640.jpg

2012년 마지막날, 아빠가 돌아가셨다. 입원을 할 때만해도 매해 겨울을 나는 걸 힘들어하셔서 올해도 한두달 병원신세를 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가족 중 아무도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지낼때도, 며칠 있다 일반병실로 옮기려니 했다. 아빠는 집에 계실 때와 똑같이 ‘자기 인생을 묵묵하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빛이 난다’는 말을 병원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사촌언니네 스무살짜리 아들에게 또박또박 얘기하셨다했다.

며칠은 멀쩡했고, 이후 며칠은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아빠가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나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엄마가 서둘러 내려오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새롭게 시작한 일자리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와 뭘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선거를 마치고 언니들과 주말에 내려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엄마 전화를 받은 날 바로 내려갔다. 아빠는 의식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똑바로 말씀을 할 순 없으셨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입원 전에 했던 마지막 대화가 뭐였더라, 언니는 엄마가 중국 가셨을 때 “엄마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더냐”라고 하던데 나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행이 보호자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중환자실에서 하루이틀 아빠 옆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못하시니 코에 관을 삽입해서 영양 같은 걸 맞고 계셨는데 말씀만 못하셨지 그런 불편함들은 다 느끼시니까 자꾸 손사래를 치고 몸을 뒤척이면서 그 관을 빼버리신단다. 병원에선 팔을 침대에 묶어놓겠다고 해 엄마가 식겁하셔서 우리가 옆에서 지키면서 손을 잡으면 안되겠냐 부탁해서 예외적으로 허락을 받았다. 엄마가 하룻밤, 그리고 내가 하룻밤. 하루를 더 있었던가… 어쩜 그 하룻밤이 의식이 그나마 있는 아빠와 마지막으로 함께 한 밤일 거다.

아빠는 말씀은 못하셨지만 답답하신지 오분에 한번꼴로 몸을 뒤척이면 앉으려고 애를 쓰시다가 이쪽저쪽으로 바꿔눕고 고통을 호소하셨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한쪽 얼굴이 점점 마비되고 괴사되어 갔는데 아마 가려움과 답답함 저려오는 통증 같은 게 복합적으로 있었을 것 같다.
날마다 각종 검사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겨우 잠든 환자를 새벽에 흔들어 깨워서 엑스레이를 찍고 피검사를 하고 또 뭐를 하고 뭐를 하고 찌를 곳도 없는 팔에 주사바늘을 들이대고 피가 안나오면 그것도 여러 번, 말씀은 못하시지만 의식이 있던 마지막 며칠엔 정말 아프셨을 거다.

나는 어쩔줄 몰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빠 아파서 어떡해요 혼잣말을 하며 아빠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그렇게 옆에 있었다. 좀 진정이 된다 싶을 땐 또릿하게 말씀을 하진 못하셨지만 아빠를 오래 봐온 가족이라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들을 하셨다.

피곤한데 뭐하러 여기서 지키고 있냐,
가서 자라. 그런 말들.
미안하면 그런짓을 하지말아야지, 농담이 섞인 그런말들.

눈에 띄게 움직임도 줄었고 의식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다른 환자들과의 형평성과 규정때문에 중환자실에서 밤을 지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삼십분의 면회시간 동안만 아빠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가보니, 새벽에 호흡이 멈췄다며 인공호흡기를 꽂아둔 거다. 그때부터 우린 이러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중환자실에 면회하듯 들어오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의사인 언니친구는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것은 사망한 시신”뿐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확인시켜줬고, 고모부는 고모가 중환자실에서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회복되어 퇴원하는 길이지만 그게 안된다면 곁에 있고 싶었다. 원래부터 심장도 약하고 당뇨합병증에 여기저기가 아프시긴 했지만 무엇때문에 아빠가 갑자기 나빠진 건지 원인도 알 수 없고 치료도 할 수 없는 지옥같은 며칠이 흘렀다. 병원비 운운하며 치료여부를 묻는 의사들에게도 신물이 났다. 누구의 누구의 누구를 건너건너 부탁하고 부탁해서 겨우 치료불가,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왜 그런말을 그런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지,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더 기다려라, 기다려라, 라고만 말했던 것일까. 그러면서 일단 뭔지는 모르지만 추정되는 원인에 대한 치료를 해보자, 근데 그게 비싸다 할래? 이런식으로 물어왔을까.

어느순간 우리는 하루 기백이 넘는 치료를 멈추고 환자 곁을 지킬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인공호흡기 장비때문에 일반 병실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또 아는사람에 아는사람을 동원해서 부탁에 부탁을 해 고향집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옮기기로 했다. 나주에 딱 하나 있는 인공호흡기, 교통사고 환자가 밤새 드나드는 응급실 한복판이 아빠의 침대였다. 상황은 나빴지만 가족이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렇게 아빠곁을 지키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잔소리가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말들, 이어지지 않던 말들. 이제는 대꾸도 대답도 하지 않으시지만 의식이 아주 조금 남아있던 순간부터 아주 사라진 그 순간까지 편지를 읽고 시를 읽고 내마음을 이야기했다.

새벽까지 아빠곁을 지키고 자러 들어간 아침, 오빠에게 아빠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다. 아빠는 십여분 후에 심장이 멈추신 뒤였다. 하지만 숨이 붙어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인공호흡기와 심장에 붙은 기계들을 떼냈다.

2012년 12월 31일이었다. 눈은 발목을 덮을만큼 많이 쌓여있었다. 장례식 3일 내내 눈은 내렸다. 아빠는 눈을 참 좋아하셨는데 당신 가는 길 눈이 내려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연휴 전날 돌아가셔서 인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오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게 하셨고 갑작스러워서 남겨진 가족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입원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준비할 시간을 적당히 주고, 너무 지치지 않게 남은 사람을 생각하시면서 가셨다.

엄마는 계속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울고 울고 또 우셨다. 그러면서도 장례준비와 산소를 알아보러 다니셨다. 우리네 장례식 원칙은 엄마가 원하는대로.
장지도, 차례상도, 장식도 모두 엄마가 원하는 대로 했다.

나는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아빠를 처음 봤을 때 아빠가 나아서 퇴원하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서서히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내게 있는 것에 감사했고 비록 임종하는 그 순간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아들인 오빠가 그 자리를 지켰다. 어른들은 그것역시 다 제사지낼 사람을 알아봐서 그런거라고 우스개소리로 말씀하셨다) 직전까지 충분히 내가 아빠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대답하지 않는 아빠에게 내 얘기만 해대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아빠와의 대화보다 편했다. 역시 부모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위해 이런 시간을 주시는 구나. 내 마음이 편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시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빠께 마지막으로 했던 큰 잘못 을 정식으로 사죄하지 못한 채 대충 뭉게면서 그냥 넘어갔고 아빠가 완성시켜달라고 하던 자서전 작업도 마치지 못해서 아쉽기는 하다. 앞으로 천천히 어느 순간 꼭 마쳐야 할 작업일 게다.

아빠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오빠는 “아버지가 바라시는 대로 형제들끼리 우애하고 잘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친척분들이 아빠 옷주머니에 노자돈, 담배값하라고 돈을 넣어주시는 순간 아빠한테 편지를 써서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급하게 쓴 편지를 잘 접어서 입관직전 아빠 수의에 꽂았다. 네.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엄마와 아빠가 살던 집에 49재를 지내는 시간 동안 엄마랑 살았다. 두 분이서 사시던 집에 엄마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빠곁을 지켰든 엄마곁도 얼마간 지키고 싶었다. 사망신고를 하고 그에 따라 해결해야할 업무들을 엄마가 하게 할 순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셔서 계좌를 닫아야 합니다”
“아빠가 돌아가셔서 명의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말들을 하는 내 마음이 이럴진데 엄마 마음을 상상할 수 없으니까.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나는 다시 엄마를 떠나, 집을 떠나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도 잘 지내신다. 이모들, 친구분들과 운동도 다니시고 가끔 자식들집에 오셔서 지내다 가기도 하시고 치과치료도 받으러 다니신다. 조만간 칠월부엌에도 놀러오실거다.20130711-123704.jpg

20130711-123730.jpg

[칠월부엌] 어쩌다 나는,

20130709-115106.jpg

어쩌다 나는 여기에서 “칠월부엌”을 하게 됐을까.

부산과 이렇게 깊고 진한 인연이 생긴 건 작년 여름부터다. 워낙에 회사를 진득하게 오래 다니지 못하는 편이라 여지껏 그렇게 다니다 말다 다니다 말다 몇년째 신입. 그래도 열심히 일하거나, 잘 하거나, 즐겁게 하려고 노력했다.
돈보다는 의미나 재미, 긴 안목을 가지고 지금을 견뎌내기 보다는 순간순간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 편이었다.

그래도 회사다니는 것 쉽지 않았다. 프리랜서를 하거나 창업을 하겠다는 마음도 없었고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회사를 다니지 않고, 돈을 벌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2011년 여름 마지막 회사 퇴사.
쉬고, 놀고, 여행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 여행하고, 그냥 있고, 다시 불안해하다가 마지막 회사에 2012년 봄 재입사. 한 달만에 후회.
한 달 동안 어떻게 하면 그만둘 수 있을까, 그만두고 뭐할까, 나란 인간은 왜 이럴까 괴로워하다가 아버지가 위독하셔서 고향에 내려가 간호를 해야한다는 거짓말을 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정말 연말에 아버지가 돌아가셔버렸다. 그 죄책감과 상실과 슬픔과 눈물은 아마 앞으로 꽤 오랬동안 천천히 무겁게 마음 한 켠에 있을 것 같다.) 마지막 회사와의 인연-입사-퇴사-재입사-거짓말하고 재퇴사-은 그로부터 1년 뒤 2013년 봄, 다시 일할까말까를 고민하게 할만큼 특별했지만 결국 직장인이 다시 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2012년 7월 여름, 서울의 모두로부터 부산으로 숨어들어왔다. 회사를 다닐 수 없는 종류의 인간임을 인정하고 불안하고 두렵지만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직장생활이 괴롭고 두렵지만 돈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거라면, 다른 방식으로 돈 문제를 해결해보자.
돈말고 다른 이유가 성취감과 보람, 만족감, 세상에 필요한 일을 해내야 한다는 책임감 등이라면 직장 생활말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돈 문제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껴쓰고 좋은 사람들에게 신세지고, 기회가 생기면 조금씩 벌면 된다. 앞으로 얼마간 살 수 있는 돈은 모아두었다. 그렇게 일년을 일단 살아내자, 그렇게 살아내고 나면 다른 힘이 생길지도 모른다. 다른 방식으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건 직장생활이 주는 보람이나 성취를 넘어서는 어떤 실현,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내가 누구에게는 빛이 될수도 있을 거다.

일단 돈을 조금 쓰면서 하는 여행은 아는 사람에게 신세지는 것이었는데, 한달씩만 산다고 해도 일년에 열 두 명, 전국 각지에 비빌언덕 열두개가 없겠냐 하는 마음이었다. 허락을 받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도 두세군데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주변에는 이런 내 계획을 지지해주는 좋은 친구들이 있었다. 기꺼이 자신의 집에 한달 머물러도 좋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래서 부산에 오게 되었다.

원래는 한 달씩 이곳저곳을 머무르며 일년을 사는 거였는데, 어쩌다보니 부산에서 두 달 넘게 지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면서 먹고 자고 조금 돈을 벌고 오랜 숙원이었던 길거리 자전거카페도 열어봤다. 그 사이 새로운 곳으로 초대받기도 했다. 그렇게 다음달 갈 곳, 할 일들이 생겼다. 국화가 아름다운 가을에 양주 한마음수련원에서 열리는 국화축제에 자전거카페가 초대되기도 했다.
부산에서 경주, 전주를 거쳐 양주에서 조금의 돈을 벌고 제주에서 놀다가 해운대 자전거카페의 손님이던 말레이시아 친구들을 만나러 페낭에도 다녀왔다. 그러던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엄마와 함께 고향집에서 머물다 재미있는 기회가 생겨서 나물공부하러 산에 들어갔다가 2013, 올여름엔 다시 부산이다.

20130709-115130.jpg

20130709-115146.jpg

20130709-11520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