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보관물: 2013/07/11

아빠, 내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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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지막날, 아빠가 돌아가셨다. 입원을 할 때만해도 매해 겨울을 나는 걸 힘들어하셔서 올해도 한두달 병원신세를 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가족 중 아무도 당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서 지낼때도, 며칠 있다 일반병실로 옮기려니 했다. 아빠는 집에 계실 때와 똑같이 ‘자기 인생을 묵묵하게 살다보면 언젠가는 빛이 난다’는 말을 병원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사촌언니네 스무살짜리 아들에게 또박또박 얘기하셨다했다.

며칠은 멀쩡했고, 이후 며칠은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아빠가 말씀을 하실 수 있을 때 나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엄마가 서둘러 내려오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부산에서 새롭게 시작한 일자리가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서울로 돌아와 뭘할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대통령선거를 마치고 언니들과 주말에 내려가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엄마 전화를 받은 날 바로 내려갔다. 아빠는 의식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똑바로 말씀을 할 순 없으셨다. 그래서 나는 아빠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입원 전에 했던 마지막 대화가 뭐였더라, 언니는 엄마가 중국 가셨을 때 “엄마 언제 돌아오신다고 하더냐”라고 하던데 나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행이 보호자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중환자실에서 하루이틀 아빠 옆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못하시니 코에 관을 삽입해서 영양 같은 걸 맞고 계셨는데 말씀만 못하셨지 그런 불편함들은 다 느끼시니까 자꾸 손사래를 치고 몸을 뒤척이면서 그 관을 빼버리신단다. 병원에선 팔을 침대에 묶어놓겠다고 해 엄마가 식겁하셔서 우리가 옆에서 지키면서 손을 잡으면 안되겠냐 부탁해서 예외적으로 허락을 받았다. 엄마가 하룻밤, 그리고 내가 하룻밤. 하루를 더 있었던가… 어쩜 그 하룻밤이 의식이 그나마 있는 아빠와 마지막으로 함께 한 밤일 거다.

아빠는 말씀은 못하셨지만 답답하신지 오분에 한번꼴로 몸을 뒤척이면 앉으려고 애를 쓰시다가 이쪽저쪽으로 바꿔눕고 고통을 호소하셨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한쪽 얼굴이 점점 마비되고 괴사되어 갔는데 아마 가려움과 답답함 저려오는 통증 같은 게 복합적으로 있었을 것 같다.
날마다 각종 검사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겨우 잠든 환자를 새벽에 흔들어 깨워서 엑스레이를 찍고 피검사를 하고 또 뭐를 하고 뭐를 하고 찌를 곳도 없는 팔에 주사바늘을 들이대고 피가 안나오면 그것도 여러 번, 말씀은 못하시지만 의식이 있던 마지막 며칠엔 정말 아프셨을 거다.

나는 어쩔줄 몰라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빠 아파서 어떡해요 혼잣말을 하며 아빠를 쓰다듬고 손을 잡고 그렇게 옆에 있었다. 좀 진정이 된다 싶을 땐 또릿하게 말씀을 하진 못하셨지만 아빠를 오래 봐온 가족이라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들을 하셨다.

피곤한데 뭐하러 여기서 지키고 있냐,
가서 자라. 그런 말들.
미안하면 그런짓을 하지말아야지, 농담이 섞인 그런말들.

눈에 띄게 움직임도 줄었고 의식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다른 환자들과의 형평성과 규정때문에 중환자실에서 밤을 지새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 삼십분의 면회시간 동안만 아빠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가보니, 새벽에 호흡이 멈췄다며 인공호흡기를 꽂아둔 거다. 그때부터 우린 이러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고 중환자실에 면회하듯 들어오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에 휩싸였다. 의사인 언니친구는 “중환자실에서 나오는 것은 사망한 시신”뿐이라는 사실을 냉정하게 확인시켜줬고, 고모부는 고모가 중환자실에서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당신이 회복되어 퇴원하는 길이지만 그게 안된다면 곁에 있고 싶었다. 원래부터 심장도 약하고 당뇨합병증에 여기저기가 아프시긴 했지만 무엇때문에 아빠가 갑자기 나빠진 건지 원인도 알 수 없고 치료도 할 수 없는 지옥같은 며칠이 흘렀다. 병원비 운운하며 치료여부를 묻는 의사들에게도 신물이 났다. 누구의 누구의 누구를 건너건너 부탁하고 부탁해서 겨우 치료불가,라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왜 그런말을 그런 사적인 통로를 통해서 들어야 하는지,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더 기다려라, 기다려라, 라고만 말했던 것일까. 그러면서 일단 뭔지는 모르지만 추정되는 원인에 대한 치료를 해보자, 근데 그게 비싸다 할래? 이런식으로 물어왔을까.

어느순간 우리는 하루 기백이 넘는 치료를 멈추고 환자 곁을 지킬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인공호흡기 장비때문에 일반 병실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또 아는사람에 아는사람을 동원해서 부탁에 부탁을 해 고향집에 있는 병원 응급실로 옮기기로 했다. 나주에 딱 하나 있는 인공호흡기, 교통사고 환자가 밤새 드나드는 응급실 한복판이 아빠의 침대였다. 상황은 나빴지만 가족이 곁에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래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나는 그렇게 아빠곁을 지키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했다. 당신과 대화하고 싶었지만 잔소리가 귀찮아서 하지 않았던 말들, 이어지지 않던 말들. 이제는 대꾸도 대답도 하지 않으시지만 의식이 아주 조금 남아있던 순간부터 아주 사라진 그 순간까지 편지를 읽고 시를 읽고 내마음을 이야기했다.

새벽까지 아빠곁을 지키고 자러 들어간 아침, 오빠에게 아빠가 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갔다. 아빠는 십여분 후에 심장이 멈추신 뒤였다. 하지만 숨이 붙어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인공호흡기와 심장에 붙은 기계들을 떼냈다.

2012년 12월 31일이었다. 눈은 발목을 덮을만큼 많이 쌓여있었다. 장례식 3일 내내 눈은 내렸다. 아빠는 눈을 참 좋아하셨는데 당신 가는 길 눈이 내려서 참 좋다고 생각했다. 연휴 전날 돌아가셔서 인사하고 싶은 사람들이 오기에 부담스럽지도 않게 하셨고 갑작스러워서 남겨진 가족들이 놀라기는 했지만 입원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준비할 시간을 적당히 주고, 너무 지치지 않게 남은 사람을 생각하시면서 가셨다.

엄마는 계속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울고 울고 또 우셨다. 그러면서도 장례준비와 산소를 알아보러 다니셨다. 우리네 장례식 원칙은 엄마가 원하는대로.
장지도, 차례상도, 장식도 모두 엄마가 원하는 대로 했다.

나는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 아빠를 처음 봤을 때 아빠가 나아서 퇴원하시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서서히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내게 있는 것에 감사했고 비록 임종하는 그 순간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아들인 오빠가 그 자리를 지켰다. 어른들은 그것역시 다 제사지낼 사람을 알아봐서 그런거라고 우스개소리로 말씀하셨다) 직전까지 충분히 내가 아빠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 대답하지 않는 아빠에게 내 얘기만 해대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아빠와의 대화보다 편했다. 역시 부모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위해 이런 시간을 주시는 구나. 내 마음이 편하라고 이런 기회를 주시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아빠께 마지막으로 했던 큰 잘못 을 정식으로 사죄하지 못한 채 대충 뭉게면서 그냥 넘어갔고 아빠가 완성시켜달라고 하던 자서전 작업도 마치지 못해서 아쉽기는 하다. 앞으로 천천히 어느 순간 꼭 마쳐야 할 작업일 게다.

아빠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오빠는 “아버지가 바라시는 대로 형제들끼리 우애하고 잘 살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친척분들이 아빠 옷주머니에 노자돈, 담배값하라고 돈을 넣어주시는 순간 아빠한테 편지를 써서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급하게 쓴 편지를 잘 접어서 입관직전 아빠 수의에 꽂았다. 네.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겠습니다.

아빠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엄마와 아빠가 살던 집에 49재를 지내는 시간 동안 엄마랑 살았다. 두 분이서 사시던 집에 엄마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빠곁을 지켰든 엄마곁도 얼마간 지키고 싶었다. 사망신고를 하고 그에 따라 해결해야할 업무들을 엄마가 하게 할 순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셔서 계좌를 닫아야 합니다”
“아빠가 돌아가셔서 명의를 바꿔야 합니다”
이런말들을 하는 내 마음이 이럴진데 엄마 마음을 상상할 수 없으니까.

벌써 6개월이 지났다. 나는 다시 엄마를 떠나, 집을 떠나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도 잘 지내신다. 이모들, 친구분들과 운동도 다니시고 가끔 자식들집에 오셔서 지내다 가기도 하시고 치과치료도 받으러 다니신다. 조만간 칠월부엌에도 놀러오실거다.20130711-12370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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