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웨이]
*질투
질투란 그런 것이다. 원하는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두려워서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버젓이 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다. 질투심의 뿌리는 편협한 감정이다. 질투는 풍성함과 다양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질투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자리밖에 없다고 말한다. 단 한 사람의 시인, 단 한 사람의 화가, 당신이 무엇이 되기를 꿈꾸는 그 일에는 단 한사람만을 위한 자리밖에 없다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행동하는 순간, 비로소 거기에는 단 한 자리가 아닌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질투가 생길 때 우리의 시야는 터널을 통과할 때처럼 캄캄해진다. 질투는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는 능력을 축소시킨다. 질투는 다른 가능성을 보는 능력까지도 빼앗아간다. 그러나 질투심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최악의 거짓말은 질투하는 것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괴팍스럽게도 질투는 행동만이 유일한 열쇠일 때 행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빼앗아버린다.
-214쪽
당신은 게으르지 않다. 창조성이 막혀 있는 것은 게으른 것과는 다르다. 창조성이 막혀 있는 사람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혐오와 후회, 슬픔, 질투에 에너지를 소모한다. 창조성이 막힌 사람들은 자기 회의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254쪽
한 시인이 동네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계속 시를 읽어주며 힘을 기르는 대신 신춘문예(시인이 아닌 사람들이 시인을 평가하는 일종의 권투시합)에서 낙선하고는 사람들에게 시를 읽어주는 것마저 포기한다.
-260쪽
[모든 게 노래]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는가에 따라 호감도가 달라진다. 좋은 단어로 빚어진 경쾌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좋게 느껴진다.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대화 속에서 자신만의 단어를 골라래는 시간이 필요하거, 자신만의 음역을 찾아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 나이가 더 들면, 쓸데없는 말을 다 버리고 (쓸데없는 비유도 하지 않고) 꼭 필요한 단어와 그 단어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목소리만 남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175쪽, 목소리는 풍경이 되고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엉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잉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180쪽, 텅 빈 가슴 안고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229쪽, 무자비한 시간을 견디는 법
독학의 절정은 실패하는 과정에 있다. 실패하지 않은면 성공의 기쁨을 알 수 없다. 취향에 맞지 않는 노래들을 많이 들어봐야 내가 어떤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내 판단으로 취향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취향에 맞지 않은 음악들을 무수히 걸러내고 남은 ‘내 노래’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32쪽, 스킵하지 않겠다
음악을 들을 때마다 뮤지션들의 시간을 생각한다.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고, 연주를 하고, 녹음을 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매를 하는 뮤지션의 시간을 생각한다. 모든 노래들은 시간을 이겨내고 우리의 귀로 전송된 음악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면 함부로 스킵하지 못하겠다. 그래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은 도저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말이다.
-34쪽, 스킵하지 않겠다.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 과정은 참 의미심장하다. 나는 정확한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내 목소리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상대방이다. 하지만 상대방이 듣는 내 목소리를 정확한 내 목소리라고 보기도 힘들다. 그 소리 역시 공기 중에서 왜곡된 것이니까. 진짜(라는 게 있다면)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목소리를 내고 목소리를 듣는다.
재능을 발견했다고 말하기에는 재능이 부족했고, 재능이 없다고 말하기엔 미미한 재능이 엿보였다 세상에 어중간한 재능만큼 불편한 게 없다. 써먹지도 못하는데, 버리기엔 아깝다.
-64쪽, 터닝포인트 뮤직
어떤 친구는 집안을 살라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고, 어떤 친구는 (다 이유가 있겠지만) 필사적으로 여자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녔으며, 나 같은 녀석은 현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음악을 들었다. 그건 부끄럽다기 보다 애달픈 일이었다. 이제는 (음악에 대해서나 삶에 대해서나) 조금 여유 만만해졌지만, 필사적인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면 이런 날이 오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69쪽, 터닝포인트 뮤직
내게 현재였던 소설 속 시간이 독자들에게는 오지 않은 미래이고, 독자들이 책을 읽을 때의 현재가 내게는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난 과거이고,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내 소설 속의 시간은 끝내 오지 않을 미래이다.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사는 것이다.
-84쪽, 해변의 아침의 오후
독자와의 만남 때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농담을 하거나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한다. 소설 얘기 같은 건 하지 않아도 우린 서로 ㄹ다들 잘 아니까, 소설 속 시간을 함께 겪은 사람들이니까, 게다가 현실의 순간을 지금 이렇게 함께하고 있으니까.
-85쪽, 해변의 아침의 오후
외국의 도시들을 다닐 때에는 눈과 귀와 코를 모두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에, 낯선 도시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다
여행 중 아주 짧은 순간 음악을 듣게 된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 다음 여행의 고단함과 경로의 고민과 소통의 난처함을 내려놓고 조용히 커피 한잔 마실 때, 피곤한 몸으로 호텔로 돌아온 다음 샤워를 끝내고 빳빳하게 세탁된 시트 위에 앉았을 때, 창밖으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질 때, 그래서 쓸쓸하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 그 순간에 음악을 듣는다.
-144쪽, 국경을 벗어난 소리
사랑을 한다는 것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에 나의 크기가 작아진다는 뜻이다. 혼자 차지하던 세계에 타인을 들어오게 하는 것이고, 타인이 잘 살 수 있게 내 영토를 줄이는 것이다. 내가 자꾸만 작아지니까 슬픈 거고, 그래서 자꾸만 물어보고 싶은 것이다. ‘날 사랑하느냐고, 날 좋아하느냐고’ 문게 된다.
-150쪽, 우리가 먼저 외로움을 찾아가자
외로움이라는 것은 아마도 사라지는 것들을 그리워하는 감정일 것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혼자라면 절대 알 수 없을 감정,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영토를 줄여본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을 감정, 함께하는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지만 결코 그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일 것이다.
– 152쪽, 우리가 먼저 외로움을 찾아가자
외로움이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그게 훨씬 덜 아프다. 외롭지 않다고 자신을 세뇌하다가 어이없는 한 방에 무너지지 말고 우리가 먼저 찾아가자.
-152쪽, 우리가 먼저 외로움을 찾아가자
흘러나오는 곡들이 싫으면서도 좋았다. 좋으면서도 싫었다. 옛 노래라서 싫다가 추억이 묻은 노래들이어서 좋았고, 따라 부를 수 있어서 좋았고, 너무 많이 들은 노래들이라서 지겨웠다. 한창 예민하던 시절에 들었던 노래들, 수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 들었던 노래들이다. 지난 시절도 마찬가지겠지. 좋으면서 지겹고, 싫으면서 그립겠지. 우리는 노래를 듣다가 조금 지친 것 같다.
-155쪽, 12 만 발 중 세 발
누구나 인생에 한 번쯤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러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시기.
-163쪽, 노래, 일발 장전
[뭐라도 되겠지]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17쪽, 쪽팔리다
한때는 유머가 이 잔인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을 웃게 한다면, 뭔가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현실과 이상이 점점 어긋나는데 유머가 무슨 소용일까 싶기도 하다. 유머가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도피처로만 쓰인다면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세상을 바꿀 수는 없어도 개인을 바꿀 수는 있을 테니까, 개인이 바뀐다면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수도 있을 테니까. 포기할 수는 없다. (……) 어쨌든 우리는 계속 웃으며 앞으로 나가가야 한다.
– 174쪽, 유머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가 다음 세대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이 자신의 기쁨을 온전하게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주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하릴없이 파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마구 뛰어놀 수 있어야 하고, 피아노를 치고 싶어하는 친구들은 굶어 죽을 걱정 하지 않고 피아노를 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절에 발견했던 온전한 기쁨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료한 일이다. 어린 시절에 온전한 기쁨을 충전해두지 않는다면 길고 긴 어른으로서의 시간을 버티기가 쉽지 않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른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흔이 되고 쉰이되고 예순이 되어서도 어떤 일에서건 온전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240쪽, 여름 바다에는 그늘이 없다
[나쁜 에너지 기행]
_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우리 시대의 제국주의, 에너지 불평등
에너지 기후 시대로 접어들면서 에너지 빈곤이 국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에너지 소비와 탄소 배출 감축은 논쟁의 여지가 없지만, ‘건강과 안락함을 위한 충분한 따뜻함’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 기본권 역시 동등하게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난방, 취사, 전기 사용을 줄이는 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고소득자들은 석유과 전기를 물 쓰듯 써도 별로 부담되지 않는다. 이렇게 왜곡된 에너지 사용 방식이 당연시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사회 안전망이 뛰어나고 대체로 부유한 유럽에서도 에너지 빈곤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에너지 빈곤이 보편적인 문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에너지 빈곤은 가구 소득, 사호 복지, 에너지 가격, 주택 에너지 효율 등 여러 요소가 얽혀 있어 복잡한 양상을 띤다. 따라서 에너지 복지는 소득, 사회서비스, 에너지 요금, 주택에 걸쳐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유럽에서만 에너지 빈곤층을 5000만 명에서 1억 25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잘산다는 나라 사정이 이런데 가난한 나라는 오죽하겠는가. 잘사는 나라가 상대적인 빈곤에 시달린다면, 가난한 나라는 절대적인 빈곤에 놓여있다. 그래서 그런지 에너지 빈곤을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을 추진하는 사례는 대부분 선진국과 선발개도국에서 발견된다. 이 국가들에서는 에너지를 ‘보편적 서비스’로 규정하고 국가와 사회의 제공 의무를 밝히고 있다.
-17~18쪽
“먹을 물도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데 전기가 무슨 말입니까? 각 가정에 전기가 공급되어 있고, 전등 한두 개와 텔레비전을 켤 수 있을 정도는 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관심사는 전기가 아닙니다”
– 117쪽
아마 조금 있으면 이 맥줏집은 동네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고, 그 포스터는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잊지 않으셨죠? 월요일 저녁에 만나요!’라고 이야기해줄 것 같았다. 일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소박한 포스터, 매주 월요일 저녁에 모여서 탈핵의 필요성과 의지를 다지는 동네 주민들, 대도시 퀼른에서 전철을 타고 30여분 걸리는 작은 도시(우리 식으로 하면 ‘읍’이라고해야할까) 베르기쉬 글라트바흐, 그곳의 맥줏집 창문에서 우연히 만나나 포스터가 독일 방문의 이율ㄹ 새삼 일깨우고 있었다.
– 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