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 보관물: 2014/05/25

사라지지 않아 지켜본 마음과 행동

별 일 없이 잘 지낸다, 고 말하지만 썩 좋지는 않다.
아팠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에 대한 핑계 정도. 아마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더 힘들었을 거다.
사랑에 빠졌던 처음 그 순간처럼 대동은 그대로 있고, 매력넘치기 그지 없는 대동작은집이 나를 위해 이렇게 나타났는데.
모두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으며 나는 여기 살고 있는데.
풍경, 햇살, 바람, 소리, 빛깔. 이 집을 둘러싼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인데.
‘우어어어어어어어 이렇게 좋다니, 나는 축복받았구나 이 은혜와 신세를 다 어떻게 갚지 어쩌면 나는 이다지도 운이 좋은거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상하다.
산호여인숙에 처음 발을 들일 때, 대동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여기 집이 만들어지고 있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때 그 순간순간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기억하는 내 몸은 계속 이상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좋지? 행복하지? 아니야? 안 좋아? 안 행복해? 왜 이렇게 불안해? 뭐가 이상해?

이상하다.
어찌할 줄 모르겠다.
늘 하던대로 아침이면 일어나 운동을 하고 아침을 챙겨먹고 일기를 쓰면 되는데, 열흘이 넘도록 하지 않고 있다.
아침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연히 더 누워있어도 되지. 하는 마음으로 뒤척인다. 회사를 가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남한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폐인이 된 것 같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냥 별 생각이 없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가진 게 처음인 것도 아닌데 어쩔 줄 모른다는 게 사실이냐 바닥?

솔직해지자, 이런 느낌은 매우 익숙하다.
자주 그런다. 좋다고 달려들었다가 금새 시들해질 때의 느낌, 숨이 넘어갈 것처럼 오늘 당장 이걸 다 어떻게든 해버려야 하는 폭풍같은 마음이 지나가고 난 뒤의 마음이다. 그럴 때면 늘 지독히도 아팠다. 힘에 겨워 그 자리를 뜨고나서도 고통은 계속 된다. 집(?)으로 돌아가도 다른 장소로 옮겨도 서너달은 이런 방황들이 계속 되었던 거 같다. 작년에 나물을 그만두고 아파서 이리저리 떠돌 때도 그랬고 그 전 해 제주에서 집짓다가 몸이 다 상해서 그럴바엔 돈이나 벌자, 생각하고 회사를 들어갈 때도 그랬다. 아, 그렇다면 지긋지긋한 회피/도피 그러다 망. 한참 후에 정신차리고 기력도 살아남. 이런 반복이 또 시작된거냐.
그렇지만 사실 이런 마음이 도망가고 싶을 때만 생기는 거겠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뭔가 해야하지만 하기 싫을 때, 지금 도대체 어떤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총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는 ‘어려운’ 순간에 생기는 마음일 것이다.

나는 생활인으로서 판단, 선택, 결정을 하는 일이 아주 미숙하다. 독립적으로 혼자 산 적이 없고 막내라 언니들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운 좋게 귀인들을 많이 만나서 여행하듯 살 수 있었다. 여행자는 살림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우렁이 처럼 집을 치우고 간단한 장을 봐서 요리를 할 수는 있지만 쌀을 사고, 세탁세제를 사고, 쓰레기봉투를 사서 당연한 하루가 돌아가도록 살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대동작은집에서 생활인으로 살아야 하는 게 지금 나한테는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다.혼자고, 방도 집도 넓고, 이제 채워지기 시작하는 새집이고, 그렇다고 늘 혼자도 아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결정해야 할 게 많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자야할지, 뭘 먹어야 할지, 지금 이방향으로 가도 될지, 시간이 괜찮은지. 혼자 다니면 상의할 상대가 없어서 불안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투닥거림이나 의견조율, 상대를 배려하고 눈치 볼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편하다. 젼혀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도 하지만 어떻게든 다 좋게 해결된다. 어쩌면 좋게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결정이라고 쉽고 편했으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던 시간들이 있었겠지. 이제는 많이 어렵지는 않다. 두려운 순간이지만 곧 지나가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간과 장소는 흘러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는 걸, 어쨌든 여행은 잘 끝난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일 터다. 돌아오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어어어어 하면서도 떠나는 길, 적절하지 않은 소비인 줄 알면서도 던지는 지갑, 그리고 마음졸이기. 여기, 남아있는 한달여의 시간도 그럴테지. 긴 여행이라고, 내가 움직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도전할 마음이 생긴다.

20대 후반 외국에 1년 나가 살 때 나는 처음으로 로션과 샴푸와 속옷을 내 손으로 사봤다. 나는 오늘 ‘산책 삼아’ 네 군데의 마트를 돌아다녔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세탁세제와 섬유유연제를 고심끝에 장바구니에 넣었다.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이 10점 만점에 8점까지 치솟았지만 이제 결제를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