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읽는 자리
대전에서 살기로 한 3개월이 지났다. 지난 겨울 천안 언니네집에서 3개월 지내면서 뫔튼튼 프로젝트에만 몰두하며 만족스런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또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여기저기 짧게 여행하며 떠도는 대신 한곳에 오래 머물면서 뭔가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대전에선 수영을 배우기로 했다. 11월에 발리에 갈 거니까. 석달 정도 배워야 물에 익숙해진다고 했다. 그래서 3개월을 생각했다. 대전에는 산호여인숙을 비롯해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으니 지내면서 새로운 관계들을 잘 맺으면 또 뭔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일이 흘러갈 수도 있을 지도 모르니까.
4월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영장을 다녔다. 보름 정도 베이비시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좀 바빴지만 즐겁게 정신없이 보냈다. 친구들을 만나고 놀고 이야기하는 게 좋지만 감정도 관계도 너무 과하다는 느낌에 혼자있는 시간이 아쉬웠다. 그렇게 5월이 되었고 혼자 살게 되었다. 기뻤다. 5월엔 스포츠용품 행사매장에서 판매아르바이트를 8일 동안 했고 수영장은 열 번도 안갔다. 산호여인숙에서 마련한 창작공간인 대동작은집에서 ‘작가’로 살기 시작했으나 쓰겠다고 한 뉴질랜드 여행기는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 아르바이트하느라 몸과 맘이 힘들었고 발가락 저림과 감기 때문에 고생했다. 컨디션은 금방 회복되지 않았다. 6월엔 수영장을 등록조차 하지 않았고 한 달 내내 무력하게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종종 커피콩을 볶고 세쪽책을 쓰며 커피를 내리며 다짐하고 계획하고 다시 무너지고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다시 다짐하기를 반복했다. 다시 살도 쪘다. 그러다 보니 6월이 거의 다 지나가버렸다.
지난주부터 대동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산호에서 마지막 일주일을 보낸다. ‘입주작가’로 지내던 긴장감과 스트레스마저도 확 떨어져서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대동에서 지낼때는 아, 써야하는데..하면서 마음이 울렁울렁 거리기는 했다. 산호에서는 늦잠자고 밥먹고 스마트폰 들고 뒹굴거리다가 졸리면 잔다. 씻지도 외출복을 챙겨입지도 않고 동네한량처럼 그냥 어슬렁거린다. 적당한 이별준비라고 하고 있지만 사실 좀 무책임하기도 하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쓰겠다고 한 뉴질랜드여행기를 완성시켜 함께 ‘읽는 자리’여야 한다. 변명하자면 써야하는데 하면서 괴로워하는 거랑, 못쓰겠다 마음먹고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거랑 괴로움의 크기는 비슷하다. 숨고 싶고 부끄럽지만 지금 이 자리를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앉았다. 어떤 의미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최소한 그래야 할 것 같다.
대동작은집은 좋은 곳이지만 어쩔줄몰라하는 내게 과한 공간이었다는 걸 인정하자. 왁자지껄한 관계를 피곤해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고립된 혼자만의 시간을 잘 꾸려가는 뚝심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외로웠고 게을렀고 괴로웠다. 세상도 사람도 시시했지만 시시하지 않은 어떤 걸 찾아내지도 못했다. 어짜피 나도 그 정도로 시시한 사람이었다. 정리하려했지만 하지못한 그 뉴질랜드 여행에서 배운 것도 비슷하다.
나는 거리를 두고 천천히 감을 믿고 관계를 맺는 유형, 낯선이들에게 먼저 다가서거나 내 얘기를 많이 하면서 친해지는 편은 아니다. 묻는 말엔 대답하기는 하지만 먼저 묻지는 않는다. 별로 궁금하지 않기도 하고 개인적인 걸 묻는 게 실례같기도 해서 주로 듣고 있는데, 재미없다 싶으면 그냥 알아서 눈과 귀를 닫는다. 자연스럽게 먼저 시작하지도 못하고 그런 의례적인 시작은 마땅치 않아 예의상 반응만 할뿐이었다. 그랬더니 여행에서 사람을 사귀는 일은 더욱 어려웠다. 자주 외롭고 심심했다. 그래도 여행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들을 보는게 감격스러웠고, 매일매일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기분이 좋았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첫날도 텐트안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잠들었다. 밖에서는 파티소리가 시끄럽게 들렸고 서글픈 기분이 조금 들었지만 나가서 함께 어울릴 수는 없었다. 용기도 없었고 재미있을 거 같지도 않았다.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 밤들을 여럿 지나면서 내가 이런 사람임을 알고 인정하게 되었다. ‘외롭고 심심해하지만 적극적으로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 민망함과 외로움 사이에서 속편하게 외로움을 선택해버리는 사람.’
많은 사람들과 흥미로운 만남을 갖지는 못해도, 순간순간 빛이 되는 시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나도 궁지에 몰리면 어떻게든 했어야 하니까 기적처럼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보통은 낯선 곳에서 한없이 외로워지는 나를 발견하고 몸을 계속 움직이고 이동하면서 그 불안함을 잊는다. 불안함을 안고 떠나고 만나고 다시 돌아온다. 여행이 끝나면 사람들이 내게 호의를 베푼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야겠다고,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을 잃지 않도록 잘 지내야 겠다고 다짐한다. 언제 어떻게 관계가 진전될지는 몰라도 씨앗을 심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계속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길에서 좋은 인연을 낚는 여행자는 될 수 없는 사람, 인연을 조금씩 여러번 쌓는 사람, 시간이 걸리는 사람. 그런 사람임을 인정하니 다른이를 부러워하면서 그렇지 않은 나를 많이 원망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감정, 욕심, 불안함이 나를 자꾸 괴롭힌다. 알아채지 못하고 그럴리가 없는데, 하고 부정하면서 시간을 자꾸 보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외롭지 않도록 친밀한 사람과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하고 싶다. 시끄러운 건 싫지만 어색한 것도 불편하다. 좋은/좋아하는 사람들과 천천히 사귀고 그 관계가 진하게 지속되기를 바라는데 시작하는 건 부끄럽고 귀찮고 기다리기 싫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세상이 시시하고 재미없지만 혼자 등지고 살고 싶지는 않다. 좋은 사람들만 골라서 만나고 싶다. 좋은글을 계속 쓰고 싶지만 치열하게 노력하고 싶지는 않다. 일하기는 싫지만 딱히 어디다 쓰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 널뛰듯 감정이 급변하는 게 싫은데 특별한 사건없는 시간들은 평화롭다기보다는 무료하다. 게으르게 지내도 불안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갖고 싶다.
대동작은집에서 이렇듯 모순 가득한 숙제를 받아들었다. 이런 혼란스런 감정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다. 여행하다 머물다가, 행복하다가 불안하다가, 바빴다가 한가했다가… 차라리 여행을 계속하면서 바쁘게 움직이면 괴로움은 사라질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더 무력해질지도 모르지만 서울집으로 간다. 일단은 그러고 싶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불안했던 시기에 가장 편하고 좋아하는 장소에 있어본 적도 있고, 공기 좋고 경치 좋은 장소에 있어본 적도 있고, 집에 있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간 적도 있는데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작년 겨울 언니집에서 운동만 하면서 살 때 좋긴 좋았는데, 지금 서울에 가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지켜보고 기다리려고. 다른 방법을 좀 찾아보려고.
